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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 연애 드림

Esoruen

비담은 오래전부터 이 광경을 꿈꿔왔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란돈과 가이오가. 둘 중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으니 제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던 그 바람이, 드디어 이루어진다.

바다도 메말라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열기 속. 불타오르는 하늘과 대지를 바라보던 그는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원시 그란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담 씨! 위험합니다, 일단 피하셔야…!”

“리더, 리더는 저기 계신 건가?!”

“간부님들과 연락이 안 돼! 큭, 열기가…!”

 

조무래기들과 동료 연구원들은 세상의 종말이라도 마주한 이들처럼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아니, ‘종말이라도’가 아니라 정말로 종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 땅의 모든 화산이 분화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물이라는 물은 모두 증발해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죽음과 불모지뿐이지 않겠는가.

 

“역시 책의 삽화랑은 다르구나.”

 

이 이후에 일어날 일을 모르는 건 아니다. 십 년도 넘게 그란돈과 가이오가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제가 어찌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비담에게 세계의 존망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도, 세상에 미련이 많은 사람도,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게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 그에게 있어 인생의 목표는 오직 이 호연지방에 전해져오는 전설의 포켓몬들뿐이었다.

그 목표만을 위해 공부하고, 진로를 정하고, 이 마그마 단에 들어와 마적의 아래에서 일했다. 그리고 이제 이 두 눈으로 그란돈을 보았으니, 이대로 세상이 끝난다 해도 아쉬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굳이 따지자면 가이오가를 못 본 게 마음에 걸리긴 했어도, 그는 과하게 욕심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비담.”

 

기이할 정도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에게 다가온 것은 평소에 그나마 친분을 쌓고 지냈었던 연구원 동료였다. 상당히 비장한 얼굴로 통신기기를 가져온 동료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심하게 망설이다가, 결국 비담에게 통화 중인 기기를 내밀었다.

 

“리더가 바꿔 달라고 하는데, 받아보는 편이 좋겠군.”

“아.”

 

잠깐 꿈이 이뤄진 기쁨에 잊고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을 가장 바랐던 사람이 하나 더 있었지. 비담은 제 상사이자 협력자인 이와 통화하기 위해 통신기기를 받아들었다.

 

“리더 마적.”

“자네! 거기서 그란돈의 모습이 보이나?!”

“예. 아주 잘 보입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못 보는 게 아쉽긴 하지만.”

“지금 그렇게 태평한 소릴 할 때인가!?”

 

어라. 반응이 왜 이러지.

비담은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10대 소녀처럼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뭐가 문제입니까?”

“뭐…?”

“그란돈은 부활했고, 비록 좀 과격한 방식이긴 하지만 서서히 대지를 넓혀갈 겁니다. 리더가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습니까?”

 

조금의 비꼼도 느껴지지 않는 비담의 질문에 통신기기 너머 마적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명과 땅 울림, 그리고 건조한 바람 소리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한참을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뗀 건 세상의 끝을 바라지 않는 사람 쪽이었다.

 

“그란돈을 통제할 방법은 없나?”

“뭐, 몬스터 볼로 포획하면 되겠지요. 포켓몬을 뜻대로 부리기 위해선 그 방법이 최선이자 최고 아니던가요? 상대가 상대인 만큼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군.”

“잘 아시네요.”

 

부하가 상사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예의도 격식도 없다. 조금은 고지식한 마적인 만큼 분명 노여워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일 텐데, 그는 화를 억누르는 것인지 이 상황을 받아들인 것인지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

“저는 연구원이지 신이 아닙니다.”

“가능성이라도 생각해 봤을 거냐는 의미다만.”

“가능성이라면 있다고 생각했지요. 아니, 거의 이렇게 되겠지 싶었습니다.”

 

아아.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통신기기 너머에도, 비담이 서 있는 곳에서도, 어디에도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이 절규하고 있었지만 두 남녀는 오직 서로에만 집중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는 이 상황에 만족하나, 비담?”

“네. 행복하군요.”

“자네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군.”

 

‘행복이니 즐거움이니 그런 건 모르는 여자라 생각했는데.’ 소란스러운 세상에 파묻혀 잘 들리지도 않을 마적의 혼잣말을 들은 비담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마 그는 모르고 있겠지. 지금 비담도 만만치 않게 상대의 행동에 의아해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는 제가 원하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게 조금 달라도, 결과물을 볼 땐 함께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했기에 아까 전 통신기기를 건네받을 때도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인데. 당신만 몰랐다고, 말이다.

 

“…비담. 지금 웃고 있나?”

“네.”

 

비담은 미소의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마적도 부하에게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그저 그는 한결 개운해진 목소리로, 한마디 대답을 뱉을 뿐.

 

“그럼 됐네.”

 

통화는 그대로 끊어졌지만, 비담은 다시 통화를 걸진 않았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통신기기만을 바라보던 그는 바람에 흩날리는 옷을 정리하고 동료 연구원들이 대피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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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스터 O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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