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비 연애 드림
모노
하트가 노아들의 손에 쥐어졌다. 이 결과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건 적어도, 검은 교단 내에는 없었다.
*
세상이 무너지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지켜야하는 걸 지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눈 앞의 힘에 굴복당하는 일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일 중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라비는 검은 교단이, 엑소시스트가 승리할 것이란 확신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는 검은 교단에 처음 들어와 놓여있는 수많은 관을 봤을 때에도 했던 생각이었다. 지는 싸움이구만. 그와 동시에 만났던 이들도 라비는 같이 떠올렸다. 흑발의 짧은 머리를 한 소녀와 울고 있던 소녀. 그들이 그 순간, 얼마나 고통 받았던가. 어린 날의 라비는 그들의 감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검은 교단은 승리에 대해 논하기에 매번 많은 것을 잃고야 말았다. 어찌됐든, 이기기 힘든 싸움이라는 생각과 엑소시스트가 이기길 바라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속한 싸움이기도 하고, 일단 엑소시스트를 동료라고 본 이상 그들의 죽음이 제게 있어 무심히 지나갈 수 없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세상이 멸망하지 않길 바라는 건 굳이 라비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쉽게 바랄 수 있는 마음이다. 하물며 이를 관전하는 입장이라면 자신이 살던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힘쓰는 이들을 단순히 보고 지나갈 수 있겠는가? 정의의 편이라 말하는 게 아니다. 제 살 길을 마련해주는 이들을 응원하는 건 생존의 법칙과 마찬가지다. 라비는 제 손에 굴러다니는 반지를 손에 굴렸다. 이제 그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와 생을 보내고 싶어 했는지 검은 교단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세상이 멸망하는 길을 그들이 모르지 않듯이.
유하, 몇 번을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이름이다. 그리 길지 않은 삶에서 몇 번이고 불렀던 이름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제게 연인이 생긴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더 할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쉽게 뱉지 못했고, 오히려 그 이름을 사랑처럼 불렀으니 질리도록 불렀던 이름이었다. 죽어도 잊으면 안된다는 듯이 애절했던 이름은 종말을 앞두고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라비는 하트가 그들 손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있었다. 멀쩡한 동료가 없고,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을 지키는 것도 버거워 기록하는 걸 놓칠 뻔한 순간에 그나마 근처에 있었길 잘했지. 아니면 놓쳤을 일이었다. 세상이 망해가는데, 겨우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록자는 세상이 바뀌고 마는 순간이 너무나도 끌렸고, 죽더라도 기록하고 싶었다. 혈육이 아닌데도 일만 하던 영감을 너무 빼닮은 탓인 게 분명했다. 정작 기록을 위해 목격한 상황은 라비에게 있어 끔찍하고, 잔인했다. 죽음이 제 코앞에 있다는 걸 의미했으며, 제 무력감이 온 몸을 뒤덮혀 저는 겨우 그뿐이라 세상에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제 삶에 한 모든 행동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노라고. 그러한 멸망 앞에 노아들도 상태가 멀쩡하지 못했으나 하트를 쥐는 손에 희열을 담은 얼굴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승리했다. 웃어도 대꾸할 말 하나 없다. 절망이 가득한 표정도 그들에게는 기쁨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라비는 웃음이 아니라 무표정을 연기해야했다. 뭐, 이제와보면 그런 표정마저 그들이 신경 쓸 리가 없었을 테지.
적어도, 라비는 그 순간에 있었다. 알렌도, 리나리도, 칸다, 크로울리, 마리, 미란다에 원수님들도. 마치 에도에서 다같이 모였던 인원에서 상황만 바뀐 모습이었다. 그때도, 유하는 에도에 없었다. 뒤늦게 나타났으나 라비는 유하가 온 순간을 볼 수 없었고, 교단에 돌아가서도 라비가 먼저 깨어난 덕분에 병동 침대에 누워있는 유하를 봤었지 마주한 게 아니었다. 이후로 습격 사건이 일어났으니 뭐 하나 제대로 살필 경향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잡혀가고, 하여튼, 기껏 제 사랑을 인정하고나니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기도 전에 일만 계속 터져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되고만 것이다. 이에 대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도, 원하는대로 흘러가는 법은 없었다. 그저 하루를 넘기며 살아가는 수밖에. 그렇게 사는 삶에도 그들 사이에 사랑이 없던 건 아니었으니.
결국, 유하는 지금 제 곁에 없다. 하트가 그들 손에 쥐어진 순간, 라비는 급하게 몸을 숨겼고, 한참 잠잠해진 후에 남아있는 동료를 찾기 위해 몸을 숨기며 돌아다녔다. 노아들이 당연히, AKUMA를 냅둘리가 없었다. AKUMA를 퍼트리는 걸 검은 교단도 그저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각자 흩어진 엑소시스트들이 우연치 않게 하트가 뺏기는 순간, 다같이 모였을 뿐이다. 모두가 모였는데, 유하가 오지 않았다는 건 적어도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라비의 시선은 여전히 반지에 향해 있었다. 살면서 자신이 착용할 줄 몰랐던, 네번째 손가락에 껴있던 반지를.
*
“ 라비, 있죠… ”
제 연인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버릇은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모양인지 유하는 어색한 웃음을 차마 감추지 못했다. 네가 뭘 해도, 나는 네가 싫어지는 일은 없을거야. 라비가 수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이름 다음으로 가장 많이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유하는 그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으나 성격이란 게 그리 쉽게 변하는 건 아니었다. 라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유하는 매순간 조심스러웠다. 그나마 자신과 있을 때, 장난스런 모습이 나오니 이미 엄청난 변화를 보여준 것이었다. 라비는 그 모습마저도 좋았으니 큰 불만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망설이고 있나? 라비는 습관처럼 짓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 유하를 사랑하는 탓에 나오는 웃음을 지었다. 움직임 따라 흔들리는 흑발이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로, 라비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행복한 미소와 약간의 장난도 담겨 있었다. 보통은 유하가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자신이 물어보는 일이 많았다. 무슨 일이야? 아니면, 눈치껏 같이 식사하러 갈래? 등의 그녀가 원하는 일을 알아차리고 권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장난스런 성격을 숨기지 못한 탓에 유하가 평소보다 더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면 라비는 장난스런 웃음이나 지으며 그녀 스스로 모든 말을 내뱉길 기다렸다. 기다릴테니, 말해보라는 식이었다.
“ 그게, 음… 내 네번째 손가락이, 비어있어서… ”
빠르게 내뱉는 말과 동시에 유하는 라비를 향해 얼른 제 손을 올렸다. 손에 쥐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탓에 유하의 손에는 반장갑을 낀 상태였다. 라비도 이노센스인 철퇴를 생각하며 붉은색보다 진한 반장갑을 끼고 다녔다. 보통 검은 교단에서 주는 물품이라 색 또한 각자 선택하거나 이미 구비된 물품을 착용하기도 했다. 유하의 반장갑 색은 검은색이었다. 평소 옷차림도 어두운 톤인 걸 생각하자면, 어색함이 없는 선택이었다. 유하는 다른 이들에 비해 피부가 더 하얀 편이 아닌데도, 제 볼을 감싸는 흑발과 깜박임 속에도 밝은 빛 하나 보기 힘든 흑안, 거기에 사복이든 악세사리든 검은색을 고르는 탓에 비교적 피부가 하얗게 보이는 날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손의 반을 덮는 장갑 때문인지 유독 하얗게 보이는 손은 라비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덥석 잡고 다녔던 손이었다. 손을 잡고 다녔을 때는 몰랐는데,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제가 생각했던 길이보다 더 길게 보였다. 아무래도 제 손이 크니, 상대적으로 유하 손이 작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라비는 유하가 한 말을 되새기며 제 앞에 놓인 손을 덥석 잡았다. 당연하게도, 제 연인의 손을 잡는 일에 망설임은 없었다. 반대로 보자면 제 연인이 자기 손을 잡는데 놀랄 일이 없을 게 분명한데도, 유하는 덥석 잡힌 제 손을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 이게 아닌데…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걸 듣자니 뭔가 자기가 상상한 것과 다른 일이 일어나는 듯 싶었다. 라비는 자연스럽게 유하의 손을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확실히, 자신과 비교하자면 작은 손이지만 제 상상보다 커다랗고, 긴 손이었다. 이러니 장총을 쥐는데 무리가 없었나? 손 끝에는 물집과 군살이 잡혀있고, 그런데도 살결이 부드럽네… 네번째, 네번째 손가락이 비어있다 그랬지? 눈 앞에 보이는 손을 글자로 하나하나 담아내고 있었을 때, 라비는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네번째 손가락?
“ 반지가 갖고 싶어? ”
“ …! ”
역시, 내가 눈치 하나는 좋다니까. 그것도 커플링으로? 제 말이 끝낼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보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낸 듯 싶었다. 그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알아냈다는 생각에 뿌듯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커플링을 맞추자는 말에 라비는 머뭇거렸다. 유하가 원하는 바를 잡아내듯 커플링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그래도 될까? 반지에 나를 옭아매도록? 이미 연인이라는 상황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 선을 맞춰가며 지내고 있고,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유하도 분명 이를 잘 알고 있을테니 망설였겠지. 말을 꺼낼 때도 조심스러웠을테고. 라비가 유하의 마음을 모르지 않듯이 유하도 라비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반지를 꼭 받고 싶어서 한 말도 아니었다. 라비가 제 의무를 저버리고 오로지 저에게 맞췄다면 그만큼 슬픈 일도 없었다. 그저 갖고 싶은 건 제 쪽이니 먼저 들고 올 생각은 이미 했었고, 정 안된다면 자신만 반지를 껴도 된다는 마음이었다. 어쨌든 자신은 연인이 있고, 이를 티내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라비는 몰라도 저는 라비에 대한 사랑을 숨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머뭇거리는 라비를 보자니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역시,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했는데. 유하는 손을 여전히 쥐고있는 라비에게서 제 손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어색한 웃음이 아니라 좀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 억지로 안 해도 괜찮아요. ’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연인이라면 고백과 동시에 반지를 맞춰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고백은 서툴고, 짧은 시간이었으나 없던 건 아니었다. 이후로 지낸 시간도 짧지 않았다. 반지를 생각한 적 없는지 묻는다면, 당연히 라비도 생각한 일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기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 여유롭게 반지를 고를 시간은 없었을 뿐이다. 유하 쪽에서도 말이 없던 이유는 서로 비슷한 상황이니 그랬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각자의 사명이란 게 있었으니. 그저 넘어가길 바랐던 건 결국, 라비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한 걸 의미했다. 북맨으로 나아갈 사명과 엑소시스트로 나아갈 사명. 사랑에 그 모든 걸 버리지 못하는 자신과 하다못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자신. 겨우 그깟 반지가 뭐라고. 네번째 손가락에 작은 링을 끼운다고 무언가를 포기해야하는 건 아니었다. 유하라면, 제 연인이라면 결국 북맨으로 나아가는 자신을 응원할 것이다. 그래줄 것이라 말했다. 저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그래놓고 망설인 꼴이라니… 제 연인에게서 그런 말이나 듣다니! 어디까지 한심해질 생각인 거야? 라비는 속으로 스스로를 욕했다. 넌 정말 겁쟁이야.
라비의 손에 있는 반지는 그렇게 생겨난 반지였다. 제 연인이 욕심이라 말했던, 스스로를 겁쟁이라 욕하게 만들었던 반지였다. 종말을 앞에 두고 그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망설이던 시간을 줄였을 텐데. 유하가 행복할 시간을 더 늘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그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라는 걸 라비는 잘 알고 있었다.
*
라비는 반지를 다시 제 손가락에 끼웠다. 원래 누구의 골렘이었는지 모를 작은 기계를 붙잡고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누구든 살아있다면 답을 달라는 목소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일부러 웃지 않아도 되는 라비가 내는 목소리인 것이다. 유하의 부재가 죽음이 아니길 바란다. 멸망하는 세상 앞에 이런 게 의미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연인이 눈 앞에 없어도 죽지 않길 바라는 건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다. 이제 북맨이고, 엑소시스트고,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과 마지막을 보내길 바라는 건 욕심이 아니다. 아무도 그리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다. 노아들이 엑소시스트를 찾아다닐테고, 괴멸한 검은 교단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자신이 보게 될 장면이 세상이 멸망하는 장면일지, 이미 시체가 된 연인의 모습일지 아무런 장담도 할 수가 없다. 굳이 생각하자면 결국 만나게 되어 같이 멸망을 보게 될 연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나을텐데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모습에 이미 많은 걸 잃어버렸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