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이 연애 드림
김사메
아이카는 본디 감정이나 사람의 마음을 파훼하는 데에 도가 튼 소녀였다. 아무리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댄다고 하여도 소녀의 앞에서는 무엇이든 까발려지기 마련이었고, 아주 빠르게, 금방, 정확하게 파악되기 마련이었다. 당장 소년이 소녀에게 모질게 군다고 해서 소녀가 눈 하나를 깜빡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빙판으로 가득 찬 하나지방의 거리, 보통의 힘으로는 깨부수기도 버거울 정도의 커다랗고 두꺼운 빙하. 소년의 절망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소녀를 바라볼 때,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저 미소를 지어볼 뿐이었다. 마치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제 플라스마단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루고 싶은 세계정복? 식은 죽 먹기겠지. 자신이 이 정도로 길을 깔아줬는데. 첫 문장을 내뱉은 것은 휴이였다. 아이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 ...어째서야? ”
“ 뭐가? ”
“ 어째서 플라스마단을 도운 거야? 왜 날 속인 거야? 사랑한다면서,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게 네 사랑의 정의야? ”
“ 글쎄, 넌 항상 너를 옆에 두고도 너의 신념을 바라봤으니까. 나는 집착이 강하거든, 그래서 그런 걸 거야. 나는 네 신념까지도 질투한 거겠지. 하지만 그게 죄는 아니잖아? ”
휴이는 아이카의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말문이 막혔다. 아이카는 마치 자신이 틀린 말을 한 적은 없다는 것처럼 가만히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결국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고, 불을 붙인 것은 너야, 휴이. 그렇게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휴이의 가슴을 찔렀다. 어째서 사랑하면서도 이토록 아픈 말들을 스스럼 없이 내뱉을 수 있는가?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아이카는 진짜 사랑의 의미를 몰랐고, 그저 어떻게 해서는 자신이 시야에 들어가기를 바랄 뿐인 흉측한 집착의 결과물이니까. 둘 사이에서는 차가운 빙하의 냉기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 ...거짓말쟁이, 난... 난 진짜, 네가 미워. ”
“ 미워할 수도 없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니까. ”
아이카는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휴이는 자신을 떠날 수 없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조차 하지 못할 것을 대강 눈치챘다. 너는 나를 떠나지 못해. 그렇게 읊조리는 말에 휴이는 쉬이 아이카의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괄괄하게 화를 낼 수도 있었을 테고, 또 한 번 화를 낼 것이라며 기세등등하게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은 악당들의 편이었으며,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자라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순 없었겠지. 결국, 어린아이다. 어른도 버티지 못할 무력감과 절망감을 고작 어린아이가 받아낼 수 없었겠지. 아이카는 결국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잘 알기에, 이런 일을 겪는다고 해서 절망감을 느끼지는 않겠지만, 결국 얕은 허황감이 불어나서 휴이를 집어삼킬 뿐이었다.
“ 이제 세계는 플라스마단의 것이 될 거야. 세계는 천천히 얼어붙을 것이고... 하나지방 이외에도 다른 곳도 노리겠지. 그들은 이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그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아. 무릇, 세계는 언젠가 종말에 이른다. ...그 시기가 조금 빨리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사실 세계가 언제 종말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
이기적인 말들만 쏙쏙 골라내서 하는 데에는 또 재주가 있던 것인지 마냥 웃음을 지어 보였다. 휴이는 아이카의 말에 틀림이 없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미 하나지방은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했고, 이렇게 있다가는 분명히 이 곳을 기점으로 다른 곳도 당할 게 뻔하였으니까. 뭐, 다른 챔피언이나 사천왕이 어찌저찌 해준다면야 조금은 늦출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휴이는 아이카의 말에 반박할 힘조차도 잃었다. 지쳐버린 것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랑도, 소중했을 만한 기억도, 각별하기 그지없는 말들. 이제는 전부 얼었다. 종말이 목을 죄어온다. 보라니까. 부질없는 세상의 끝은 원래 좀 빠른 편이야. 언제나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는 없단다. 쓸데없는 말들로 한 번 더 휴이의 강한 의지에 흠집을 내었다. 다시는 희망 따위 갖지 못하도록, 절망 앞에서 무릎을 꿇도록. 무릇, 사랑하는 만큼 절망을 심어주려고 하는 것이 아이카라는 소녀의 본질이었다. 포켓몬 하나 꺼내지도, 배틀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그런 휴이의 상태를 대충 파악한 아이카는 결국 거리를 좁혔다.
“ 괜찮아, 세상이 종말하더라도 우리 둘은 무사할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거든. 이제 나는 그들의 편도 아니며, 플라스마단과 나는 서로를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 이외에 네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은... 그래, 사라지겠지. 얼어붙어서 깨지든, 제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든. 그래도 내가 네 옆에 있잖아, 그러니까... ”
“ ... ”
좀처럼 말이 없는 휴이에게 어느정도 다가선 아이카는 이내 팔을 벌려서 휴이를 구속하듯 끌어안았다. 세계가 종말한다면, 더 이상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남지 않아. 그런 생각이었다. 결국 아이카는 자신이 오롯이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휴이가 사랑하던 다른 것들도 없애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리석고 이기적인 생각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여자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 사랑해, 나의 달. 종말 앞에 한없이 무너지는 너마저도 나는 사랑할 수 있어. 종말하는 나락의 끝에서도 그저 사랑하자. ”
새파랗게, 그리고 차갑게 얼어가는 세상의 끝자락 가운데에서도 그저 여자의 집착만이 뜨겁게 불타는 채로 그 자리에 공허하게 남았다. 종말에서부터 비롯되는 게 사랑이라면 그렇게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