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메트셀크 짝사랑 드림
레기
파이널판타지14 다섯 번째 확장팩, 칠흑의 반역자 결말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늦었다. 아르버트가 다급하게 레기네에게 손을 뻗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몸은 속에서부터 갈라지며 하얀 빛을 피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눈, 코, 입, 귀 할 것 없이 얼굴의 온 구멍에서 빛이 줄줄 흘러나온다. 인간이 어떻게 죄식자로 변모하는지 본적이 있는 레기네는 격통 속에서 몸을 떨며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나는 실패했구나. 내게 허락된 영웅의 운명은 여기까지구나. 사실 실패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레기네는 영웅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그 행세를 하고 있었을 뿐이지 진짜 영웅이 아니었다. 그러니 실패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련하듯 몸을 떨며 고개를 든다. 주위가 온통 검고 발아래가 붉게 타오르고 있는데 시야만은 새하얗다. 그리고 새하얗게 물든 시야로 보이는 것은 한 점의 어둠이었다. 검보랏빛으로 물든 남자의 영혼. 그가 섬기는 신과 닮은 빛깔의 영혼이 일렁이는 것을 보며 레기는 문득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실망스러워하고 있을까? 경멸스러워하고 있을까? 혐오스러워하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빛만 토해내고 있으려니 머리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뚝 떨어진다.
“가엾은 것.”
언제 다가온 건지도 모를 에메트셀크가 무원죄 왕관에서 그랬듯 레기네의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았다. 레기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어 고개를 조금 더 든다. 그러자 쩍, 소리가 나며 목에서부터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고개를 들었다. 실금이 얼굴과 가슴으로 번져나간다. 피부와 살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그 꼴을 본 에메트셀크가 혀를 찬다. 살고 싶어 버둥거리는 모습으로 보였던 건지 빈정거리며 조롱하는 목소리가 내리꽂힌다.
“이제 와서 살고 싶어지기라도 했나? 정말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어. 이딴 것도 영웅이라고 우리에게 반역하려 들다니, 이래서 불완전한 것들은…….”
“다, 당신의…….”
평소라면 끝까지 그 빈정거림을 들어줬겠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예감하고 그의 말을 끊는다. 입 안에 가득 고인 빛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 어요.”
에메트셀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새하얀 시야로 그의 영혼이 동요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레기는 흐릿하게 웃었다. 자신을 휘틀로다이우스라고 소개했던 그 고대인이 말했던 대로 에메트셀크는 영웅의 영혼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다 못해 사랑하는 듯 했고, 그 영혼이 빛 따위에 오염되어 사라진다는 사실이 더 없이 괴로운 모양이었다. 맞아, 사랑을 잃는 건 괴롭지. 그러니 이렇게라도 빈정거리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레기네는 에메트셀크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지만, 이 영혼만은 그가 사랑했던 사람의 것이니까. 에메트셀크에게 있어서 그 영혼을 가진 레기네를 죽이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이젠 거의 다 희어진 눈동자가 허공을 헤맨다. 에메트셀크는 망설이듯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가 영웅에게로 손을 뻗는다. 뺨을 감싸 쥐고 가볍게 당긴다. 또 살점이 빛으로 변해 조각조각 떨어져 내린다. 어둠과 빛이 맞닿은 곳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며 따끔거린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그가 있었다. 눈동자는 더 이상 허공을 헤매지 않고 똑바로 에메트셀크를 바라본다. 여전히 새하얀 시야에 보이는 것이라곤 검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어둠 밖에 없음에도 마치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처럼. 그 곧은 시선에 에메트셀크가 견딜 수 없는 참담함을 느끼든 말든 레기는 그저 기쁜 듯 웃었다. 얼굴을 보았으니 이제 됐다. 마지막까지 미뤄왔던 결정을 내릴 때가 왔다.
레기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수정공이 꾀했던 방법을 차용해 레기 본연의 힘을 써서 빛을 가지고 차원의 틈이든 에테르계로든 사라져 이 세계에 어둠을 되찾아주는 것과, 그냥 이대로 빛의 괴물이 되어 세계가 종말 하는 순간까지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 사실 영웅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더 이상 영웅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레기가 선택해야하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이 세계에 어둠을 되찾아주어야 했다. 그리고 진짜 영웅에게 자신의 자리를 돌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레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의무를 져버리고서라도 에메트셀크의 곁에 있고 싶었다. 왤까?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사실, 그 의문에 대한 답도 정해져 있었지만 레기는 굳이 그 답을 찾지 않기로 했다.
레기는 처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거역하기로 한다. 죄악감을 저 멀리 미뤄두고 자신의 욕망에 몸을 맡긴다. 고개를 쭉 뻗어 에메트셀크와 입술을 맞대고 가볍게 비빈다. 괴로운 가슴에 형용하기 어려운 충족감이 차오른다. 입가를 적셨던 빛이 그의 입술에 묻어날 것이 분명해 약간 미안했지만 마실 것도 아니고 닦아내면 되니 괜찮을 것이라는 태평한 생각을 한다. 이제 실금은 다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껍데기의 붕괴가 점점 더 빨라진다. 주위에 널린 빛 때문에 몸에서 그림자까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레기는 입술을 맞댄 채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빙그레 웃었다.
“미안, 해요.”
에메트셀크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무형의 힘이 그를 부드럽게 밀어낸다. 에메트셀크가 경악하며 의문스러워하는 것을 무시한 레기네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새벽의 현자들을 둘러보다가,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수정공을 본다. 그는 서럽고 절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책감과 죄악감에 젖어 괴로운 얼굴. 물론 레기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의 영혼이 서럽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수정공이 다급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한다. 제발, 그러지 마. 하지만 레기는 수정공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후들거리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 하얗게 물든 어둠 속에 남은 것은 오로지 레기뿐이다. …… 아니. 레기의 힘에 저항하며 버틴 어둠의 사도도 함께였다. 하지만 레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레기네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둥실 떠올라 실처럼 가늘게 이어지며 그녀의 몸을 감쌌기 때문이다. 아아. 이제 모두 끝이다. 레기의 사명도, 삶도. 레기는 몸을 축 늘어뜨리며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덮는다. 이내 빛이 얽히고 설켜 거대한 고치로 변한다. 불길할 정도로 거대한 빛을 품은 고치가 빠르게 몸을 불리며 태동한다.
에메트셀크는 그조차 파훼할 수 없는 강한 힘에 가로막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빛의 고치를 바라만 보며 낮게 침음한다. 방금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언제고 무언가를 구원했던 영웅은 이제 저 끔찍한 빛의 고치 속에서 변태하여 다시 태어날 것이다. 아마 이 세계에는 더 이상 당할 자가 없는 가장 강력하고도 완전한, 이 세계를 종말로 이끌 빛의 괴물로.